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번의 난 (문단 편집) === 전반기(1673년 ~ 1675년) === || [[파일:external/www.cskms.edu.hk/43.jpg|width=100%]] || || 삼번의 난 전반기 형세도. 붉은 선은 오삼계 군의 진격로, 초록색 점선은 경정충 군의 진격로이다. || 반란 직후, 강희제가 내려보낸 운귀(운남, 귀주)총독 [[https://baike.baidu.com/item/%E7%94%98%E6%96%87%E7%84%9C|감문혼]]이 이를 막으려 했으나 운남, 귀주 양 지역에서 황제가 임명해보낸 총독의 명을 받드는 관료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오삼계의 반란군에 가담하여 총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되는 상황에 빠져버리자 절망하고 가족들과 함께 자결했다. 그만큼 운귀 지역은 수십여 년 동안 오삼계의 통치를 받으면서 철저한 오삼계의 세력이 되어버렸다. 강희는 팔기군을 형주(荊州),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호북성 강릉에 보냈다. 순승군왕(順承郡王) [[https://zh.wikipedia.org/wiki/%E5%8B%92%E7%88%BE%E9%8C%A6|늑이금]]이 영남(寧南)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패륵 찰니(察尼), 도통 각라주만, 호군 통령 이이도재 등 만주 팔기를 진격시키며 늑이금은 출발하면서 "운남과 귀주의 토벌은 8월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라 큰소리를 쳤다.[* 늑이금은 후에 겁을 먹고 전투를 회피한다.[[http://magneo.egloos.com/m/726991|#]]] 한편, 철번을 위해 내려왔다 간신히 반란군의 손길을 피한 관료들이 반란 11일 만에 중국 남쪽 [[곤명]]에서 수도 [[북경]]까지 밤낮없이 내달리는 처절한 레이스 끝에 반란 사실을 보고하자 청 조정은 멘붕에 빠져 철번을 주장한 관료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철번을 물리고 오삼계에 화해를 청하자고 주장했다. 강희제 본인도 설마 오삼계가 진짜 실력 행사로 나올줄은 예상 못해 당황했으나 이내 곧 침착을 되찾고 조정 내 화의파를 닥치게 한 다음 반란 토벌을 선언하고 반란 토벌의 격문을 띄웠는데 그 내용은 "'''오삼계 네놈은 명 부흥을 대의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애초에 명을 멸망시키는 데 앞장선 놈이 네놈 아니었냐? 네놈은 명에게도 반란군, 우리 청에게도 반란군이며 아무런 대의도 없다.'''"로 오삼계의 대명의 복수라는 논리를 완전히 논파했다. 그러나 전쟁은 말 싸움으로 되는 게 아닌 법이다. 1674년 초, 오삼계는 직접 군을 이끌고 [[후난성|호남]]과 [[후베이성|호북]][* [[삼국지]]에서 [[유표]]가 다스리던 그 형주다. 호북은 형주 북부, 호남은 형주 남부 4군.]으로 진격하여 총병관 체세록을 생포하고 정부군을 격파하며 순식간에 장사를 점령하고 호남을 휩쓸며 강서성으로 가는 길목을 열고 북으로는 무창에 이르렀다. 뒤이어 사천성에서도 오삼계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 사천마저 오삼계의 손에 떨어졌다. 이에 강희제는 내응을 우려하여 북경에 있던 오응웅[* 오응웅은 오삼계의 맏아들이다. 청 태종의 14녀인 건령공주와 결혼했고, 맏아들은 오세번, 차남은 오세림이다. 오세번은 북경 탈출에 성공했으나, 오세림은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한다. 그리고 그보다 어린 아들들은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된다. ~~[[내가 고자라니]]~~]을 교수형에 처하고, 군을 재정비하고, 경정충과 상가희에게도 급히 사신을 보내 "'''내가 어리고 우둔하여 조금 경솔했다. 철번은 취소하니 너희들이 계속 다스려라.'''"라며 철번을 취소하며 두 번의 반란 가담을 막고자 했다. 동시에 명에서 투항한 항장들 다수가 각 지방의 총독, 순무를 맡고 있어 반란에 줄줄이 합류할 가능성이 보이자 역시 칙령을 내려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충성하여 반란군 토벌에만 전념하라고 격려하며, 오삼계의 반란이 삼번의 반란이나 반청 복명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674년 3월, 결국 정남왕 경정충이 근거지 복건에서 반란에 가담, 절강, 강소 두 성까지 휩쓸고 대만 동녕 왕국의 지원까지 받기로 하면서 상황은 강희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서남과 촉에 국한되는 게 아닌, 화남 전역을 휩쓰는 대규모 전란으로 발전했다. 아울러 사천 지방이 오삼계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오삼계는 사천에서 [[한중]]을 거쳐 [[중원]]으로 나아가는 북벌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섬서 총독 왕보신이 반란을 막기 위해 온 조정 중신과의 반목과 불화로 인해 반란에 가담하면서 [[섬서성]] 대부분이 오삼계군에 떨어지고 [[서안]]만이 외로이 남아 있었다. 한편 광동의 상가희의 경우 상황이 복잡했다. 전략적, 지리적 측면에서 상가희의 광동은 서쪽으로는 오삼계의 운귀 지역, 동쪽으로는 경정충의 복건, 북쪽으로는 오삼계가 점령한 호남에 둘러싸여 청 중앙군의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또한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상가희는 철번 명령을 수용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심 강희제에 대한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때문에 철번을 진행하기 위해 광동으로 왔던 호부 상서 양청표 등 조정 인사들은 상가희가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서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오삼계가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상가희가 조정 인사들과 만나자, 양청표는 재빨리 기지를 발휘해서 위의 철번 취소령을 말해주고, 강희제가 상가희를 깊이 신뢰한다고 말했다. 불만이 있긴 했지만 반란 자체에도 회의를 가졌던 상가희는 이를 계기로 조정 편을 들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상가희는 결국 강희제와 청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는 상주를 올려 강희제를 기쁘게 하였다. 상가희가 청에 충성한다는 것은 삼번 전체가 반란에 가담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는 것과 동시에, 평남왕과 광동군의 군사력을 반란 진압에 투입할 수 있고, 무엇보다 백전노장 오삼계에 맞서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없어 연전 연패 중인 무능한 지휘관들과 달리 군력에서 오삼계와 맞먹는 상가희를 맞수로 투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강희제는 상가희에게 주변 지역 인사권, 군사권, 단독 작전권을 모조리 보장해주고, 상가희가 원하는대로 차남 상지효를 후계자로 인정해주었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광동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상가희는 본래 장남 상지신을 후계로 하려고 상주를 올렸다가 전란의 와중에 상지신에게 실망하여[* 상가희는 위에 언급한 양청표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작은 연회를 열고, 자식들과 휘하 장수들이 조정 인사들에게 인사하도록 했다. 그런데 상지신은 조정 인사들에게 인사를 하려 들지 않았고, 이에 상가희는 크게 화가 난 나머지 상지신의 손을 깨물어 버리고 '소인은 폐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라며 사죄한 일도 있었다.] 차남 상지효를 새 후계로 삼고 강희제의 승인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상지신은 마침 상가희가 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서 광동의 전권을 장악하고 오삼계와 연합 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 상가희는 상지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자결 자체는 가족들이 발견해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결국 건강을 해쳐서 병으로 사망했다. 죽기 직전의 유언도 '황제께 큰 은혜를 받았는데 적을 무찌르지 못하고 죽으니 큰 허물이 남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엔 혼백이라도 황제를 섬길 것이다.' 라며 강희제에게 충성한다는 내용을 남겼다. 이로서 강희제가 그토록 염려하던 삼번의 동시 반란이 현실화하는 것 같았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